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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종
최성종(동양문화연구소 부소장)
성균관 전 전례위원장
무형문화재 제 85호 석존(의례)부분 이수
성균관 유도회 서울금천지부 회장

儒敎立國의 朝鮮黨爭政治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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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6-22 09:34 조회4,1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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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敎立國의 朝鮮黨爭政治 考察

鄭 玧 洙(성균관 석전교육원 석좌교수)

  歷史가 없는 현재와 미래는 존재할 수 없기에 우리들이 역사를 배워 익히는 이유는, 現世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自畵像’을 조명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역사에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未來를 인도하는 敎科書的「지침서」이므로, 우리의 先人들이 남긴 자취는 모두가 후세들에게 값진 敎訓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시대를 살다 가신 先人들의 삶을 반추해서 이를 ‘溫故而知新’으로 삼아 평소 생활에 있어서 修身齊治를 이룩할 수 있는 마음의 양식으로 간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筆者는 우리시대와 근접한 조선왕조대에 유교적 정치상황을 고찰하여 여러분과 함께 그 내용을 새삼 논의해 보고자한다.

1. 麗末鮮初의 時代的背景

  高麗王朝 末葉에 亂世를 當하여  社會的 혼란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당시 政治版圖는 守舊的 溫健勢力과 改革的 新進勢力으로 兩分되어 있었다. 改革新進勢力은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가 도덕적으로 부패했던 高麗王朝를 폐하고, 儒敎를 國政基調로 하는 朝鮮王朝 開創을 선택했다. 朝鮮王朝를 開國한 이후, 일부의 勳舊勢力들이 政局을 主導하고, 특히 太宗代에 으르러 王權 强化論者들은 정국안정에 따른 不事二君의 政策으로서, 高麗遺臣들을 객관적 기준 없이 忠臣과 反對勢力으로 兩分시켜, 이를 옹호하거나 제거하는 정책을 펼쳤으므로, 學德높고 志操 있는 士大夫는 政界 隱退와 出仕 拒否의 事態까지 발전했다.
  당시의 정세가 이와 같기에 ‘고려왕조’를 지키려는 세력은 忠臣으로 평가받고, 조선왕조를 개창하고 이 시대에 벼슬한 세력들은, 모두 ‘변절자’로 폄하 당하는 정치적 ‘아이러니’ 현상을 초래하게 됐다.
  하지만 개국초기의 ‘不事二君’이라는 기본시책은 쇠퇴해서 世祖代에 이르러, 왕위를 찬탈하는 정치적 난세를 맞아 무고한 선비들이 무참히 처형당하는 극한 상황이 전개 됐었다. 당시 단종의 복위를 시도하다 동지의 배반으로 발각되어 본인은 물론, 가솔마저 연좌당해서 씻을 수 없는 恨을 남긴 死六臣의 한 사람인 참다운 선비 成三問은 황해도 ‘수양산’을 방문하고 돌아와 다음과 같은 詩를 남겨, 절제와 도덕성을 잃고,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극히 감동을 주고 있으니 이분이 곧 萬古의 忠臣이 아니던가!

※ 詩題 : 首陽山 바라보며 (成三問)

초장 : 首陽山 바라보며 그곳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 죽었다는 伯夷와 叔齊를 한탄 하노라
중장 : 차라리 굶주려 죽을지언정 고사리는 왜 캐서 먹었단 말인가?
종장 : 비록 고사리가 별것 아닌 풀잎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땅에서 자란 것이라는 말인가?
제 11대 中宗이 등극한 후 趙光祖를 비롯한 新進士林들은 勳舊勢力들의 勳功을 삭제 또는 削減시키자는 主張이 高潮되면서 兩大 勢力의 政治的 쟁투는 시작되었다.
  (훈구세력 : 國初의 개국공신 정종과 태종대의 정사공신, 세조대에 43명의:정란공신, 예종대에 ‘남이’장군을 역모로 몰아 죽인 간신들, 그리고 중종대의 박원종 등 반정공신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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