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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시비선악(是非善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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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6-15 09:15 조회9,1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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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은 세상에 나와 어머니 젓과 분유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이빨이 나면서 밥을 먹고 무럭무럭 성장한다. 젊어서는 왕성한 식욕으로 체력을 유지하고 일도 많이 하지만 고령이 되면서 식사양도 줄고 기력도 떨어지다가 신체가 전반적으로 줄어들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가 먹지 못하면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아등바등 데면서 살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단, 구수한 땅콩처럼 좋은 식품이 다양하게 이 땅 위에 생겨나 많은 동물과 사람의 양식이 되고 있듯이 좋은 사람으로 교육되어 이 세상 만물과 더불어 오래도록 상생하다가 가면 그것이 곧 행복이요 보람이 아니겠는가. 다툼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시비선악(是非善惡), 요즘에 시비와 선악을 잘 가리고 구별하고 있지 않으세요?

세상에는 늘 시비와 선악의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를 논리적으로 따지기보다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을 때 내가 옳은가 상대가 옳은가를 따질 때 흔히 시비(是非)가 붙었다고 하거나 시비를 건다고 한다. 즉 A와 B가 시비가 붙으면 서로가 자기의 생각과 주장이 옳다고 함으로서 순간적으로 격한 싸움으로 번진다. 그래서 경찰서로 가기도 하고 법원에 가서 판결을 받고 콩밥을 먹기도 한다.

과거 전통사회에는 어떤 일로 당사자 간에 시비가 생기면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미덕(美德)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평소에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윤리 도덕적인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양교육의 영향으로 실용주의적 교육으로 변화됨으로써 기술과 기능 면에서는 향상이 되었으나 사람의 품성이 예전만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갈수록 사람 간에 시비가 붙으면 감정이 격해지고 법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 현상은 서구화 과정을 밟는 것으로 서양에서도 중세의 신(神) 중심 기독교 문화의 오랜 전통을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자각운동이 소위 르네상스라는 문예부흥운동으로 일어났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1596~1650)가 인간존재의 정의를 처음 내린 이후 파스칼(1623~1662)이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에 비유하였고, 이어서 니체(1844~1900)가 당시 기독교 문화 풍토에서 “신(神)은 죽었다”고 파격적인 주장을 하며 권력의 의지를 지닌 영웅의 탄생을 예고하고, 보통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초인(超人)’을 고대하며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후로 서구사회는 인간 중심의 비판철학의 꽃을 피우게 되어 관념론(觀念論)과 경험론(經驗論)이 쌍벽을 이루며 철학계를 풍미했다.

이러한 연유로 정신분석학, 사회학, 심리학도 발전하면서 시비(是非)를 논하고 중재(仲裁)를 하는 풍조가 널리 일반화되었고, 한편 전통 기독교도 문예부흥의 영향을 받아 루터의 양심선언과 함께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고 성당과 교회가 공존하며 철학계와 평행선을 이루어 사랑의 메시지를 전파하며 인간의 선악(善惡)에 대한 대중적 이해도를 높여 왔다.

일반적으로 시비 문제는 개인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정의와 부정부패의 문제에 서도 위정자와 사회지도층이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가리면서 정책 사업이 바른길로 가도록 하여 국민의 생활안정과 행복감을 충족시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만일 정치인과 경제인이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국민은 이에 실망하고 불신하여 명랑사회를 그르치는 각종 범죄를 유발하게 되고 사회불안요소가 증폭되기도 한다. 따라서 선행(善行)보다는 악행(惡行)을 저지르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성교육의 부재 속에 한 가닥 희망 사항이 부모와 선생과 지도층 인사의 언행인데 한마디로 시비선악(是非善惡)으로 집약하여 나타난다.

기성세대가 일상생활 속에서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착하고 나쁜 것을 구분하는 가치관을 행동으로 보일 때 자녀나 2세들은 자연히 본받게 된다. 청학동의 어느 훈장 말씀처럼 “몸으로 가르치니 따르고, 입으로 가르치니 반항하네”의 가르침이 좋다. 말로 가르치는 것은 곧 잔소리로 들리고 자주하면 신경질적 반응을 나타내어 소통이 막히게 된다. 오히려 감정이 개입하면 해악을 범하는 돌발행동을 자초하여 큰 불행을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지나치게 시비를 따지는 것도 문제요, 성급하게 선악을 가리는 것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일의 경중을 살펴 때로는 관용과 용서로 포용하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 시비를 가린다고 곧바로 상대를 질타하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므로 상대의 의사를 듣고 차분히 대화를 나누면서 풀어가는 방법이 최선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황희 정승 같은 선현들은 매사에 일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듣고 선후본말(先後本末)을 가려서 신중히 처신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다음은 과유불급(過猶不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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