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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배수진,신립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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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2 17:01 조회26,6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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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충주는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군사적 전략상 최요충지이기도 했다.



선조 25년 4월 왜군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부산 동래를 거쳐 서울로 북상해 오자 신립은 도순변사가 되어 충주지역을 지키게 되었다. 당시 충주는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전략상 요충지이기도 했다.

신립은 유성룡이 모집한 군관 80여명과 함께 훈련 한 번 받아 보지 못한 농민들 중에서 군대를 모집해 가며 4월26일 충주에 도착하여 단월역에 주둔시키고 진을 쳤다. 그가 끌어 모은 군사는 겨우 8천여명 이었고 그것도 화살 한번 제대로 쏴 보지 못한 오합지졸들이었다.

한편, 4월25일 상주에서 진을 치고 있던 이일장군은 적의 급습을 받아 문경으로 후퇴하고는 조령을 지키기 위해 이동 중 신립이 충주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조령의 변길과 함께 충주로 내달았다. 신립은 이들을 선봉으로 삼고 단월역에 진을 치고 작전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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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에서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적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면 좌우에서
일제히 공격하여 격멸하자 하였으나....




종사관 김여물은,

\"적의 세력이 우리의 몇 배나 되니 정면으로 싸우면 전세상 불리할 것 같습니다. 이들의 예봉을 꺾으려면 천험의 요새인 조령에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적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면 좌우에서 일제히 공격하여 격멸하고 만일 적의 공격을 당할 수가 없으면 차라리 물러가 한성으로 들어가 지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라고 제안을 하였다.
또한 충주목사 이종장도,

\"적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우리가 넓은 평지에 있는 것은 옳지 못하고 험한 곳을 지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입니다. 그러므로 넓은 들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니 조령의 험한 곳을 의지하여 깃발을 많이 세우고 연기와 불로 적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적을 기습하여 승리하는 방책으로 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막료들 역시 이 작전에 찬성을 하였으나 신립은 고집을 부리며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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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오랑캐를 물리친 기병의 위력을
생각하며 지형의 이로움을 가볍게 여겼다...




이유인즉, 적은 이미 문경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서둘러 조령을 지키는 것보다 넓은 들에 적의 보병을 끌어 들여 이를 우리의 기병으로 요격하면 먼 행군에 지친 적을 가히 무찌를 수 있을 것이며 아군은 모두 훈련이 미숙한 새로 뽑은 군사인데다가 더구나 그들은 평소에 서로의 의사가 소통되지 못하였으며 상하가 단합도 충분하지 못하니 사지(死地)에 넣지 않으면 그 투지를 드높일 수 없을 것이라 하고
지난날 오랑캐를 물리친 기병의 위력을 생각하며 지형의 이로움을 가볍게 여겼던 것이었다.

또한, 적이 조령에 다다랐으니 서둘러 옮기는 것보다는 오합지졸인 우리 군대를 통솔하기에는 배수(背水)의 진을 치고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신립은 단월역에서 상주의 패장 이일을 만나보고 처음에는 목을 베어서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으나 지난 날 그의 공이 아까워서 종군하여 스스로 공을 다시 세우는 기회를 주기로 하고 그의 작전구상을 물어 보았다.
이일은 서슴치 않고 대답하기를
\"적은 경오, 을묘 때의 왜적과 다르고 북쪽 오랑캐 같이 치기 쉬운 적이 아니니 물러 가서 지키는 것만 못하다\"

하니 신립이 크게 노하며 책망하여 말하기를

\"그대 또 다시 우리 군사까지 망쳐놓으려는 것인가\"

하고 이일과 변기 두 장수를 선봉으로 삼아 공을 세울 것을 부탁하였다.
신립은 뒤로는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앞으로는 충주분지가 펼쳐진 탄금대에 학날개 모양의 배수진을 쳤다.




한신(韓信)의 고사에 따라 탄금대 배수진을 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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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적군은 26일 아침에 상주를 출발하여 함창을 거쳐 문경에 도착했다.
문경에서 항복하지 않은 현감 신길원을 죽이고 하룻밤을 묵은 후 27일 문경을 출발하여 조령을 넘어 28일 아침 수안보를 지나 정오경에는 충주 남쪽 단월역에 다달아 척후로 하여금 아군의 상황을 정찰케 하였다.

신립도 27일 적의 상황을 알아 보고 있었다. 그 날 충주성 안에서 작전을 계획하고
한신의 고사에 따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기로 하였다.
다음날인 28일 아침 일찍이 신립은 군사 8천여명을 거느리고 충주성을 떠나 탄금대로 출발하였다. 신립은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중간지대의 저습지에 진을 치고 적이 남쪽 산간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우리군사의 진용은 총지휘관인 도순변사에 신립장군, 순변사 이일, 조방장 변기,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등이 대오를 정비하고 있었다.
한편 적은 정오부터 공격준비를 시작하였다. 좌익대장 아쓰우라의 3천 병력,
우익대장 종의지의 5천 병력, 중앙대장 고니시의 7천 병력이 합하여 1만5천명이 공격에 직접 참가하였다.

예비대는 아리바, 오오무라, 고지마 등이 거느리는 3천7백여명의 적병은 충주성을 점령하고 있었다. 적은 좌익대로 달천우안의 본도를 따라 전진하고 나머지 부대는 충주 본가도를 따라 탄금대에 접근하여 삼면으로 포위 공격하여 왔다.




기마병이 말을 타고 달리며 싸우기는 불편한 지역이었다.



신립이 점령하여 진을 치던 지역의 서쪽과 북쪽은 달천과 남한강이 막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에는 지금은 달천강에 제방을 쌓고 관개시설을 하여 옥토가 되어 있으나 당시는 늪으로 갈대가 우거진 갯벌이어서 군사 활동이 적당치 않았으며 더욱이 기마병이 말을 타고 달리며 싸우기는 불편한 지역이었다.

또한 전날 밤에 비가 와서 기마병이 활동하는데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다.
험로를 쉽게 넘어 닥친 왜군은 깃발을 휘날리며 창검을 번뜩이고 개떼처럼 몰려 왔다. 우리군대는 수적으로도 열세일 뿐만 아니라 오랜 평화속에서 전쟁을 모르고 살아온 오합지졸들이었다.
이에 비하여 왜군은 오랜 전란을 통해서 훈련되고 단련되었을 뿐아니라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까지 갖추고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으니 결과는 이미 예견되었다.

신립은 제1차로 기병을 돌격시켰다. 1천기의 군사가 일제히 창과 칼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무찔렀다. 적은 보병이라 말에 밟혀 죽고 창에 찔려 죽는 자가 허다하고 함성과 비명이 메아리치고 아군과 적군은 하나가 되어 뒤엉켜 싸웠다. 전세를 파악한 신립은 다시 제2차로 1천명을 적진에 돌격시켜 혼전하는 싸움터에 진격시켰으나 피아의 사상자만 내고 일진일퇴하였으나 좌우에서 몰려오는 적세가 강대해졌다.

신립은 제3차로 2천명의 기병을 돌진시키니 말의 돌진소리, 조총소리, 인마의 고함소리가 탄금대 벌판을 뒤덮었다.




\"그대를 살려 볼까 하오\" ....

....... \"어찌 내가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




전세를 지켜보던 신립은 김여물을 남겨 놓고 직접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였다. 신립의 앞을 막는 자는 없었으나 개떼 같이 달려드는 적병을 어쩔 수 없어 되돌아오니 종사관 김여물이 말을 타고 최후의 총 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립은 그를 돌아보며 미소를 짓고 하는 말이
\" 그대를 살려 볼까 하오\" 하니
김여물은 빙긋이 웃으며 \"어찌 내가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

하고 같이 말을 달려 총 돌격대의 진두에 나서 깊이 적중으로 들어가니 적진이 크게 흔들렸으나 승리를 할 수는 없었다.
신립과 김여물은 좌충우돌 왜병을 수십명 거꾸러뜨리고는 두 사람이 함께 북쪽을 향해 절을 한 뒤 탄금대를 끼고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온 백성의 신망을 한 몸에 안고 나선 용장은 그의 부하들과 함께 탄금대에 천추의 한을 뿌린 것이다.
나머지 병사들은 충주 목사 이종장과 조방장 변기의 지휘아래 굳게 뭉쳐서 배수진을 끝까지 지키다가 필사의 힘을 다하여 적과 싸웠으나 패하고 무기와 시체만이 달천벌을 메우고 강물은 핏빛으로 물들고 주인 잃은 전마의 슬픈 울음만이 벌판을 덮고 있었다.




탄금대를 끼고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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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전선을 수습하고 충주성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도착한 2번대의 가등청정과 합세하여 같은 달 30일 서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순변사 이일은 도순변사인 신립의 뒤에 멀리 따라가면서 조총을 피하다가 사잇길을 쫓아 산중에 들어간 다음 적병 수명을 만나서 활을 쏘아 죽이고 한강을 넘어 북으로 달아났다.
이일은 사람을 시켜 장계를 급히 조정에 올리게 하니 조정에서는 비로소 충주전투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패전의 소식을 접한 조정은 한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 신립의 나이 47세, 훗날 조정에서는 그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장(忠將)이라 하였다. 1981년 10월에 탄금대에다가 시민들의 뜻을 모아 그의 순절비를 열두대 옆에 세웠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7-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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