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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보호에 앞장서는 국민

조선시대에는 청소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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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2 15:46 조회26,2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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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일생은 연령에 따라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유아니 소년이니 장년이니 노년이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연령의 변화에 따라 신체에 변화가 생긴다는 점에서 생물학적인 구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각각의 범주를 나누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사회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서 문화적인 구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인생의 구분은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청소년'이 없었다. 이 점이 오늘날과 두드러지게 다르다. 오늘날은 아동과 성인 사이에 청소년이란 범주를 설정한다. 그리하여 아직 완전히 성숙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자기 행동을 책임질 수 있고 미래를 예비하는 존재로서 '청소년'이 있다. 근대 초기 이런 개념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었을 때 청소년에 대한 그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이광수는 <소년>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청소년을 근대성의 자각의 주체로 설정하였으며, '청년이여, 분발하라'는 구호가 근대 잡지마다 넘쳐났다. '청춘의 끓는 피'는 민족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파악되었다. 청소년에 대한 이러한 개념 정립은 '육체적으로 나약하고, 정신적으로 어리광이나 부리고 철부지 같은'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10대 말의 연령층을 자각시키기 위해 등장했다.

조선사회에서는 아이와 어른 사이에 어떠한 범주도 없었다. 어느 시점을 전후하여 아이가 갑작스럽게 커버려 어른이 되었다. 그런 전환점은 혼인과 '관례'의식이었다. 관혼상제 중 하나인 관례란 '남자는 상투를 틀어 갓을 쓰고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지니는 의식'을 말한다. 즉 성인이 되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원래 유교 규범에 따르면 이 관례는 스무 살 때 행하는 것이었으나 조선사회에서는 조혼 풍습이 유행함에 따라 15세 전후에 관례와 혼인을 치렀다.

관례는 삼국시대 때 중국으로부터 예교와 함께 전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시대에는 와가에서만 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대부 사이에서도 널리 하게 되었다. 그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단발령이 내려져 머리를 깎게 되면서 전통적 의미의 관례는 사라지고 오늘날에는 구식 혼례식에서 여자의 쪽을 찌고 비녀를 꽂는 의식인 계례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관, 혼을 거치면 이미 어른이었다. 그들은 집안의 테두리를 벗어나 어엿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오늘날과 비교할 때 조선 사람들은 일찍부터 정계에 진출했다. 갑신정변 주역 중 한 사람인 서재필은 당시 18세였으며 '백두산 돌 칼을 갈아 모두 없애고 두만강 물 말 먹여 모두 없앤다'는 기개를 떨쳤던 남이 장군은 28세때 이미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요즘 같으면 대학입시 학력고사를 준비하거나 겨우 사회에 입문할 나이에 말이다. 오늘날처럼 고령과된 사회에서는 감히 꿈꾸기 힘든 일이다.

어른과 아이를 구별할 때처럼 거창한 의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조선사회에서는 장년과 노인의 구별도 뚜렷이 존재했다. 조선사회에서는 50세가 넘으면 노인의 길에 들어섰다고 인식하였지만 노인으로서 어엿한 대접을 받기 시작하는 것은 60세가 넘어서였다. 인생 최대 명절 중 하나인 환갑잔치는 바로 60세를 기념하는 것이다. '환갑, 진갑 다 채웠다'는 속담처럼 60,70세까지 살았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효를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적 조선사회에서 노인은 공경을 받았다. 조선 초기 법령집인 [경국대전]에서 '나이 80세가 넘은 관리는 한 계급 승진, 70세 이상의 당상관에게는 술, 고기 등을 나누어준다.'라고 규정하였으며, 이후 법령집에서도 노인 우대를 중시하였다. 관리가 아니라도 왕과 왕비는 효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전국의 80세 이상의 남녀 고령자를 특별 우대하였다. 세종 이래 10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초에 쌀을 주고 매월 술과 고기도 주었다. 또한 9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매년 술과 고기, 술잔을 주었으며 8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지방관으로 하여금 향응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나라 시책과 달리 조선시대 내내 노인이 공경을 받은것 같지는 않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푸념하였다. '지금 풍속을 징험해 보니 가정에서는 자제들이 부형을 없신여기고 나라에서는 소년들이 노인을 능멸하는데, 이런 풍속은 과거제도의 폐해에서 비롯한다. 소년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여러 사람이 다 원하고 부럽게 여겨, 다만 미천한 자만이 우러러 볼뿐만아니라 자기 집 부형까지도 억눌리게 된다,' 오늘날 고3 수험생이 집안 최고 대접을 받듯 '과거'병이 풍속을 어지럽히는 주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7-2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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