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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한국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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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6-07-28 16:44 조회27,5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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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로 살펴본 한국불교
한국의 불교 한국의 불교는 인도나 중국불교의 단순한 연장도 퇴화도 아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해서 만주대륙과 한반도 등의 우리 민족문화권에로 동류(東流)한 뒤, 우리나라의 지역과 풍토 및 민족성 안에서 독특하게 전개되었다.

(1) 전래

삼국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약 2 • 3백년 후에 중국에 전파되었고, 중국에서 한반도에도 약 2 • 3백년 후에 전파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반화과정이 진행된 후에 왕실이나 국가에서 거국적으로 국교로 선포하기 때문이다.
372년(소수림왕 2) 국교로 선포된 불교는 전진의 왕 부견(符堅)이 보낸 순도(順道)를 법사(法師)로, 불상과 불경 등이 고구려 왕실에 전하여졌다. 이에 소수림왕은 사신을 보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순도로 하여금 왕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2년 뒤인 374년에는 진나라의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왔다.
소수림왕은 그 이듬해 봄에 성문사(省文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세우고 순도와 아도를 각각 그 절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 두 절은 한국 최초의 절이다. 고구려에서 처음 받아들인 불교는 ‘인과적(因果的) 교리로서의 불교’ 또는 ‘구복(求福)으로서의 불교’로 보고 있으나 실은 토속적 기복(祈福)을 벗어나는 수복적(修福的) 불교이다. 이 수복적 불교의 증거가 고대 삼국국가 중 고구려가 제일먼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의 기틀을 잡게 한 획기적인 일이 그것이다. 수복(修福)은 수심신복(修心身福)의 의미로 심신(心身) 을 잘 수행(修行)해야 복(福)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적극적인 인과의 개념인데 이를 기복(祈福)으로 오판함은 잘못이다.
391년(고국양왕 8)에는 임금이 교칙을 내려 ‘불법(佛法)을 숭신(崇信)하여 복(福)을 구(求)하라’ 하며 더욱더 불교를 장려하였다. 여기에서 불법(佛法)이란 인과응보 (因果應報) 적 상대성 세계관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고, 숭신(崇信)이란 숭심신신 (崇心身信) 즉 몸과 마음으로 믿고 받들어 수행하면 복이 있다는 수복(修福)적 의미의 교시이다. 맹목적인 기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384년 (침류왕 1)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 (滅難陀)가 동진(東晋) 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서 서울인 광주(廣州)의 남한산으로 들어오자 왕은 그를 궁안에 머물도록 하였고, 그 이듬해 10명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었다. 526년(성왕 4)에는 인도에서 귀국한 겸익(謙益)을 맞이하여 불교가 크게 발전하였다. 신라의 불교수용은 순탄하지 않았다. 신라가 고구려의 세력을 배경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로부터 묵호자(墨胡子)가 신라의 서북경 지방인 일선군 (一善郡:善山)에 들어와 모례(毛禮)의 집에 기숙하면서 불법(佛法)을 전하였으며, 모례는 신라인으로서 최초의 신도가 되었다. 그때 중국의 사신이 향(香)을 가지고 왔으므로 묵호자가 나아가 분향예불(焚香禮佛)하는 법을 가르치고 공주의 병을 완쾌시킴으로써 신라왕실에서도 불교를 알게되었으나 별로 신도를 얻지 못하였다. 그뒤 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에서 아도(阿道)가 들어와서 불법을 전도한 뒤로 신봉하는 자가 늘어났다. 신라에 왔던 이 아도는 고구려에 왔던 중국승 아도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며, 아도라는 이름은 머리가 없는 자라는 뜻으로 삭발승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보고있다. 그뒤에도 신라왕실은 불교공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씨족중심 귀족들의 끊임없는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씨족적 기반을 억누르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확립하고자 했던 왕실파(王室波)들은 법흥왕을 중심으로 불교를 새 지배체제의 구축을 위한 정신적 지주로 삼아서, 왕법(王法)과 불법(佛法)을 동일시하고 부처님의 위력을 왕의 위력으로 대치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570년(법흥왕 7)에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국가조직에 관한 정비를 일단락지은 법흥왕은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를 계기로 배불파(排佛派)를 제압하고 불교국교를 선포하였으며, 529년에는 영을 내려 살생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차돈이 순교한 지 7년 뒤에는 그가 절을 만들고자 했던 천경림(天鏡林)에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하였고, 법흥왕은 왕위를 진흥왕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법공(法空)이라고 불렀다. 이때의 불교는 ‘선행수복(善行受福)의 불교’ ‘인과응보적 권선징악의 불교’였으며 고구려와 같이 토속신앙과 자연스럽게 혼합되었다.

(2) 삼국시대(4국시대)

고구려 고국양왕이 불교를 신봉하라는 칙령을 내린 이듬해인 392년(광개토왕 2)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였고, 395년에는 진나라 승려 담시(曇始)가 교화를 위해 고구려로 왔다. 담시는 불교의 교리연구 및 설법의 이해에 필요한 경률(經律) 수십부를 가지고 왔고, 수계(授戒)를 베풀어 불제자가 되는 길을 트이게 함으로써 불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맞게 하였다. 498년(문자왕 7)에는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으며, 576년(평원왕 18)에는 의연(義淵)을 중국 북제로 보내어 정국사(定國寺)의 법상(法上)에게 불기(佛紀) 및 중국의 불교전래등 불교의 역사전개와 교학(敎學)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를 배우게 하였다. 그는 대승론서(大乘論書) 의 저자 및 저술연기(緣起), 그 저술이 가지는 영험등에 관한 것을 자세히 배워가지고 돌아왔는데, 그가 관심을 가지고 새로 가져온 경론(經論)들은 후일에 신라의 학승들이 철학의 전거로 삼아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5세기 전기간에 걸친 고구려의 관심사는 어떻게 백제를 공략하고, 신라의 세력을 꺾느냐 하는 데에 쏠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기간의 불교관계기사는 498년(문자왕 7) 가을에 금강사 (金剛寺) 가 생겼다는 것과 도림(道琳)이라는 중이 망명을 가장하고 백제에 들어가 백제왕의 신임을 받고 첩자(諜者) 노릇을 했다는 것 두가지 밖에는 없다. 576년에 의연은 십지경론 (十地經論), 대지도론(大智度論),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 금강반야경 (金剛般若經) 등 매우 중요한 대승불교(大乘佛敎)문헌의 저술자, 저술연기 그 영험등의 자세한 기록 등을 전제(前齊)에서 가져왔다.
위의 불전 중 《대지도론》은 반야중도사상(般若中道思想)의 조술자(祖述者)인 nagarjuna(龍樹)의 저작이고 , 《십지경론》 • 《금강반야론》은 유식사상(唯識思想)의 대가인 vasubandhu(天親 또는 世親)의 저술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이러한 중요한 경론에 관한 연구는 고구려에서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만 것같이 보인다. 의연의 유학에 앞서 양원왕(陽原王 549-558)때에 고구려의 고승 혜량(惠亮)은 신라로 망명, 그곳에서 최초의 국통(國統)이 되고 신라 불교의 밑거름 역할을 한다. 그때 이래로 고구려의 승려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눈부신 포교를 하게 된다. 혜변(惠便, 584년에 도일), 혜자(惠慈, 595년 도일), 승융(僧隆, 602년 도일), 담징(曇徵, 610년 도일), 혜관(惠灌, 625년 도일), 도등(道登, 627년 도일), 도현(道顯, 668년 도일) 등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고구려에서 이미 6세기 중엽부터 불교를 경시하거나 배척하는 기운이 싹터 있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불교는 도교의 득세로 말미암아 점차 빛을 잃고 말았다. 도교는 624년(영류왕 7)에 들어왔으며, 643년(보장왕 2)에 연개소문 (淵蓋蘇文) 이 당나라로부터 숙달(叔達)등 8명의 도사와 《노자도덕경 老子道德經》을 받아들인 뒤부터는 불교를 박대하였다. 사찰을 몰수하여 도관(道館)으로 삼았고 그때까지 불교인을 대우하던 자리에 도교인을 앉히는 등 불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하였다. 이 갑작스런 변동에 불교인과 국민은 외국으로 망명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승 보덕(普德)은 이를 고구려 멸망의 징조로 여기고 여러차례 조정에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당시 백제 땅인 완산주(完山州,全州)의 고대산(孤大山,高達山)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그뒤 고구려는 곧 멸망하고 말았다. 이는 멸망전 18년전의 일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승려들은 일본에 불교를 심어준 지대한 공로를 남겼는데, 특히 혜자는 595년에 일본에 귀화, 성덕태자풍총(聖德太子豊聰)의 스승으로서 백제로부터 온 혜총(惠聰)과 더불어 일본불교의 두 기둥이 되었다. 당시의 일본불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불교의 연장이라고 보아 마땅한 것이었다.
고구려 불교의 사상적 주류는 반야공사상(般若空思想)의 천명에 주력한 삼론종계통 (三論宗系統)이었는데, 고구려 요동(遼東)출신인 승랑(僧朗)은 바로 중국 남조(南朝)에서 삼론을 개척하여 신삼론종(新三論宗)의 개조로 섬겨진 스님이었다.
한편 백제의 불교도 결국은 고구려의 경우와 비슷한 결말을 보게되었다. 백제에 불법(佛法)이 시작 된 것은 서기 384년(枕流王 1)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동진(東晋) 으로부터 백제왕실에서 예경(禮敬)을 받은 이후의 일이다. 그는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가르쳤다고 하며, 특히 도술(道術)에 능한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에 처음 불교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포교승들은 대개 기적과 영험에 의존하는 일이 많았다. 마라난타 이후 백제에서 과연 어떠한 변천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최근에 발굴된 25대 무령왕(武寧王, 501-522)능에서 전혀 불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이때까지 백제의 불교는 적어도 지배층에게는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 26대 성왕(聖王, 523∼553)대에 이르러 불교는 확실히 활발한 표면활동을 전개한다. 526년에는 겸익(謙益)이 인도에서 배달다(倍達多)라는 승려를 동반하고 돌아와 율(律)을 번역하기도 하였는데, 이때에 국내의 고승 28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성왕은 일본의 서부희씨 (西部姬氏)에게 달솔 (達率), 노리 사치계(斯致契) 등을 파견 금동석가상(金銅釋迦像) 일구와 미륵석불(彌勒石佛) 및 번개(幡蓋), 경론(經論) 몇 권을 보내어 일본에서 불교를 알게 되는 최초의 계기를 마련한 임금이다. 이후 백제의 왕실은 일본에 대한 지대한 불교교화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백제불교는 역시 사상적으로는 삼론(三論)에 치중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적극적이고, 개척적인 긍정적 태도보다는 다분히 염세적 기복적(祈福的) 경향으로 흘러갔던 것같고, 앞서 말한 겸익의 영향도 있어 계율에 관하여서는 매우 정통적인 이해가 있었던 것 같다. 이와 아울러 백제 불교의 특징은 그 예술적 표현력의 탁월성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찰 건축에 필요한 모든 기술, 즉 토목, 회화(繪畵), 와전(瓦塼), 불상조각 등 다방면에 걸처 단연 고대 한국 미술의 으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때에 따라 유약한 기풍을 나타내고 사치한 경향으로 흘러, 불교 본래의 사명에서 벗어나는 폐단도 보였다. 일례로 법왕(法王)은 599년 전국에 영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심지어는 어렵(漁獵)의 도구까지도 불태우게 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는 왕흥사 (王興寺)라는 큰절을 짓기 시작하여 35년이란 장기간에 걸쳐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 절은 그 아들 武王(무왕, 600∼640) 35년에야 완성되었고,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 641-660)이 즐겨 유행(遊行)한 곳이다. 이는 계율의 형식주의적인 이해, 신앙의 천박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고구려의 불교가 지배층의 몰이해(沒理解)속에서 조락 (彫落)해 갔던 것과 비슷하게, 이번에는 지배층의 그릇된 불교이해 때문에 불교와 사직(社稷)이 동시에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에도 외국 포교승(布敎僧)의 발길은 미쳤다. 일선군(一善郡) 모례(毛禮)의 집에 와있었다는 묵호자(墨胡子)가 그 예이다. 그러나 신라에서 불교가 실질적으로 문화상 중핵(中核)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서기 528년(法興王 15)부터이다. 법흥왕은 이차돈 (異次頓)이 군신(君臣)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법의 신봉은 공인되고 국교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순교한 후, 그 이적(異蹟)에 놀란 신하들의 회개(悔改)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불교를 널리 펴게하였다. 이것은 신라 불교가 고구려나 백제의 불교와는 달리, 찬란한 융성의 꽃을 피우게 될 불후의 씨였다. 그로부터 수년후 법흥왕은 천경림(天鏡林) 에 신라 최초의 정사를 지었다. 그 공사가 끝나자 왕은 왕위를 진흥왕(眞興王)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었다. 이 절이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이다. 흥륜사가 완공되면서 신라 출신의 승니(僧尼)가 배출되기 시작하였고, 549년과 565년에는 각각 중국에 건너갔던 각덕(覺德)과 명관(明觀)이 돌아왔다. 그들은 양(梁)의 불교를 들여왔다. 551년에는 혜량(蕙亮)이 고구려로 부터 와 승통(僧統)으로서 승려의 교육과 대중교화의 증임을 맡았다.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회(八關會)등이 열리고, 화랑 (花郞)이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삼아 독창적인 엘리트문무(文武)겸비 집단으로 크게 성장하는 것도 진흥왕대의 일이다. 화랑도(花郞道)는 불교가 신라에 성공적으로 토착화한 하나의 탁월한 실례이다. 진흥왕은 황룡사(皇龍寺, 567)를 비롯한 기원(祈園) 실제 (實際)의 두 절을 세웠고(576), 황룡사에는 장육(丈六)의 불상을 주조해서 안치하였다. 그후 진흥왕도 마침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완성(完成)을 위한 것이었다. 진지왕(眞智王) 초년(576)에는 수나라에 갔던 안홍(安弘)이 《능가경 楞伽經》과 《승만경 勝만經》등 장차 신라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될 중요한 경전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무렵 신라에서는 유학승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원광이 600년, 담육이 605년, 지명(智明)이 602년, 그리고 620년에는 비마라진제 (vimalaparamartha), 농가타(農伽陀:nongata), 불타승가(buddhasangha)등의 호승 (胡僧)과 한승(漢僧) 두사람이 당으로부터 신라에 왔다. 신라에서 인도로 간 스님도 많았고, 원광(?∼630)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준 유명한 신라불교의 거성이다. 원효, 자장, 의상은 거의 동시대의 사람이다. 자장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 신라인의 정신적 결속을 이룩하였고, 신라를 불국정토(佛國淨土)라고 믿게 하는 현실안심의 신앙의 씨를 뿌렸다. 원효 • 의상의 민중불교와 왕실불교의 조화 또한 신라의 반도 통일의 기운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문무왕 8년(668) 51세의 나이에 이룩한 원효의 이론적 • 실천적 • 대중적 실행은 위대한 한국의 지도자요, 위대한 교육자상 그것이었다.
이로써 비교해 본다면,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 • 백제 • 가야불교보다 활기에 찬 생명력이 있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에서는 온 국민의 불교이해가 비교적 정확하였으며, 군(君=王), 신(臣), 부(父), 자(子), 부(夫), 부(婦)간에서 불심(佛心)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공통된 마음가짐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3)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을 맡게된 데에는 직접적 • 표면적으로는 군사적 승리에 기인한 바가 많으나, 근본적으로는 정신적 승리가 더 큰 작용을 했다고 보아야한다. 그리고 그 정신적 승리는 바로 불교정신의 올바른 이해를 토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① 연구의 노력 ② 시대적 좋은 인연 ③ 지배층의 마음으로부터의 공명과 삼위일체가 커다란 원동력이었다. 여기에 원효, 의상, 자장, 원광과 같은 쟁쟁한 학승, 계율승, 호국승, 사상승들이 고구려나 백제보다 월등하였다는 사실이다. 고구려나 백제의 불교는 반야공사상을 중시하는 삼론종(三論宗)에 머물러 있었던 감이 있고, 백제에서는 율(律)을 중시하였지만, 율의 심오한 가치관 정립을 위한 철학적 의미까지는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소승적 경지에 머물고 만 것이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일찍이 자장에 의해 화엄적인 사고방식이 도입되었고, 그보다 앞서 원광 이래로 유식(唯識)의 도리와 보살계(菩薩戒)의 사상도 소개되어 원효가 활약하는 7세기말, 즉 통일전야에 있어서의 불교이해는 이미 선진 중국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로 정확한 것이었다. 중국인들이 원효를 ‘동방의 부처’로 불렀음은 이의 증거다.
불교는 신라에게 통일의 이상을 제시해 주었고, 그 방법과 수단을 준비할 수 있게 하였다. 화엄의 이상은 사사무애(事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의 통일, 평화에 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대승적 윤리가 신라에서만큼 분명하게 제시된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신라인들로 하여금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게 한 정신적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4) 고려시대(高麗時代)

신라말의 선문구산(禪門九山) 개산 이래 한국의 불교는 다분히 선종 (禪宗,zen buddhism)에 기울어진 느낌이다. 그것은 그대로 중당(中唐)이후 중국불교의 경향과 일치하고있다. 6조 혜능의 남돈(南頓) 선(禪)이 금강반야경을 존중 그의 고향 조계 (曹溪)의 보림사를 중심으로 하었고 스스로 인도의 달마의 계승자라고 자처하였는데, 한국의 선맥은 바로 이 남선의 조계종(曹溪宗)이다.
고려후기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7-1210)의 출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려 불교는 선교병립(禪敎병立)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의천(義天, 1055-1101)은 고려에 천태종(天台宗)을 중흥시키고, 호국기원(護國祈願)의 목적과 교학진흥의 뜻을 겸하여 《대장경(大藏經)》의 수집, 간행에 진력한 공이 컸으나 선 • 교 양종의 원융적인 회통(會通)에 미흡한 점이 아쉽다. 그러나 지눌이 신라의 화엄전통을 재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이다.
《진심직설 眞心直說》 등은 바로 그가 증득한 결론으로 고려불교의 수확이며 원효 불교의 르네상스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중선경교(重禪輕敎)는 신라의 원효와 같은 현실세계에 과감히 파고드는 무애행(無碍行)의 실천이 없었다. 고려불교는 이후 다분히 기복적(祈福的) 산중 은둔적 불교, 궁중과 부녀자 불교로 전락되어 가는 경향이 있게 된다. 고답적인 산중 선불교나 교불교는 또다른 형이상학을 낳아 민중과의 거리가 넓어졌다. 결국은 의례(儀禮)의 불교가 흘러 넘치게 되었다. 몽고지배하에서 타락된 의례불교는 결국은 고려 멸망의 다른 한 원인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고려조 455년 동안, 더 나아가서 이차돈(異次頓)의 순교 이래(528) 조선 태종(태종, 1401∼1418)이 배불정책 (排佛政策)을 단행하기까지 근 9백년 동안이나 면면히 불교신앙이 활발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중요한 이유는 조선조 이전에는 한반도에 불교에 대항할만한 다른 종교나 다른 이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진다.
문화적으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민족문화를 남겼음은 고려불교의 위대성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된 금속활자와 대장경조판의 현존은 인류 역사에 금자탑을 쌓는 쾌거가 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선도(禪道)와 의례(儀禮)의 두가지 정신이 생활에 밀착해서 고려청자(高麗靑磁)의 미(美)가 창조되어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이 두가지 문화적 유산은 불교로 함양된 고려인의 청정하고 충직한 마음의 결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조선시대(朝鮮時代)

고려말엽에 일기 시작한 유학자들의 배불운동은 드디어 왕조가 바뀌자 정치적 지배법칙과 그 역학적인과(力學的因果)에 따라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의 등극이 비록 무학대사를 왕사로 모시긴 하였어도 그 정치적 권력의 배경은 고려왕실과 구귀족의 몰락을 위해 불교를 배척했던 것이다.
인도스님 지공(指空), 태고보우(太古普愚), 혜근나옹(慧勤懶翁)등의 명승이 나타났으나 정도전, 조준 등의 정치적 공세로 인하여 태종, 예종(1469년), 성종(1470-1494), 연산군(1495-1506), 중종(1507-1544), 인종(1545)대에 이르기까지 암흑기였다. 함허득통(1368∼1433)의 불교 • 유교의 인의예지와 불교의 인간완성이 같다는 계몽도 있었고, 세조때는 일시적으로의 비호시책이 있었으나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수난의 불교시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5백년의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고 찬란한 신라와 고려의 불교전통을 오늘날까지 계승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명종대의 섭정 문정왕후에 의해서였다. 1546년 왕후는 섭정이 되자 설악산의 백담사(百潭寺)의 승 보우(普雨)를 중용, 그의 의견을 들어 봉은사(奉恩寺)를 선종(禪宗),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의 근거로 삼고 보우와 수진(守眞)을 각각 양사의 주지로 삼았다. 이것이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불교재건이다. 보우는 선사(禪師)로 간주되었지만, 특히 화엄의 도리에 밝고, 그 원칙아래 다양한 불교의 흐름을 일관적으로 이해하는 탁월한 사상가이자 행정가였으나 유생의 미움을 받아 비명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는 불교계에 닥쳐온 새로운 암운이었으나 선조(宣祖) 25년(1591), 풍신수길(豊辰秀吉)의 침략을 맞아 국가가 누란(累卵)의 위기를 당했을 때 청허유정(淸虛休靜, 1520-1604)과 그 제자들은 홀연히 일어나 전국의 승려들을 이끌고 의승군(義僧群)으로서 궐기, 그 충절과 용기로써 불교의 영광을 되찾는 계기를 얻었다. 청허휴정은 태고보우(太古普雨) ∼ 환암혼수 (幻菴渾修) ∼ 귀곡각운 (龜谷覺雲) ∼ 벽계정심 (碧溪正心) ∼ 벽송지엄 (碧松智嚴) ∼ 부용영관 (芙蓉靈觀) ∼ 청허휴정으로 상전(相傳)하는 법계(法系)를 가지는데, 그는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송운(松雲) • 처영(處英)등의 제자와 더불어 근 7천여명에 달하는 승군을 이끌고 8도 선교(禪敎) 19종 도총섭(19宗 都總攝)이 되어 왜병을 물리쳐 신라통일 시기의 호국적 전통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에게는 또한 선교석(禪敎釋) • 선가귀감 (禪家龜鑑) 등의 선서(禪書)와 시문집(詩文集) •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있어 조선문화의 불교적 공간을 메꾸어 주고 있다. 그의 제자 사명 송운, 유정(松雲惟政, 1544∼1610) • 편양, 언기(鞭羊 彦機, 1581∼1644) • 소요, 태능消遙 太能, 1562∼1649) 은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의 정신을 계승하여 저마다 제자들을 키워, 이후 조선불교의 명맥을 잇는 고승들은 그 밑에서 배출되게 되었다. 조선의 고승들중 의심(義諶, 1592∼1665)은 교학중흥의 조(祖)로서 화엄에 밝았으며, 최눌(最訥, 1717∼1790)은 고금의 전기 • 시서 • 백가의 언설에 박통하고 삼장(三藏)에 두루 통달, 선 • 교양문에서 전인미도(前人未到)의 일가견을 가졌었고, 유일(有一, 1720-1799)도 <기신론> <능엄경><원각경>등에 밝은 선 • 교 겸비(禪敎兼備)의 고승이었다.
순조(純祖)이래로 조선의 쇠운은 날로 더해가 선 • 교 양종이 모두 부진한 상태에 들어갔다. 조선의 전시대에 걸쳐 불교는 전대와 같은 흥성한 영광을 누리지 못하였다. 언제나 억불숭유(抑佛崇孺)의 공적 분위기는 불교를 음지에서 시들게 하였고, 이에 따른 부수적 현상이 나타났다. 미신적 요소와의 결합, 소극적 인생관, 염세주의적 분위기, 당당함이 없는 승려들의 비하감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고구려나 백제의 위정자들이 저질렀던 것과 꼭같은 지배자들의 사대주의, 시대적 오판, 불교정신에 대한 무지, 세계흐름에 대한 둔감 등이 초래한 국가위기 관리 능력 부재에서 야기된 것이다. 여기에 또 당당한 승려들을 키우지 못한 불교 종단 내부의 우매함도 일조를 하여 승속인 종단과 국가가 다 함께 위난의 길을 재촉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이조시대의 가난하고 불우한 민중들을 위해서는 거의 유일한 종교적 위안과 용기를 주는 원천이 되었고, 일단 유사시에는 살신활인(殺身活人)의 저력을 발휘하여 국가를 지켰다.

(6) 근대

1895(고종 32) 4월에 승려의 도성출입이 자유화되어 서울에서의 포교가 자유로워졌다. 1899년 동대문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한국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인 국내 수사찰로 삼고 13도에 각각 하나의 수사(首寺)를 두어 전국을 통합하였다. 그뒤 1902년에는 정부에서 사원관리를 궁내부소속 관리서를 설치하여 사사관리 (寺社菅理) 세칙을 정하였다. 1906년에 원흥사에 불교연구회가 설립되어 여기에서 명진 (明進) 학교라는 근대적 불교교육의 최초의 모태가 되어 오늘날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의 전신이다. 1910년 일본에에 의한 조선의 멸망으로 불교도 조선 총독부하에 들어가 지배되었다. 30본산제가 마련되고 각황사(覺皇寺)가 연합사무소가 되었다. 1941년에는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曹溪寺)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조계종(曹溪宗)이라 개칭했다. 1945년10월 광복 후 새로운 불교 교헌을 제정하고 초대교정에 박한영(朴漢永)을 추대하였다. 1940년 혜화전문학교 (惠化專門學校)를 설립, 1946년 9월에는 동국대학으로, 1953년에는 종합대학인 동국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3. 1독립의 대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같은 이가 출현하여 앞장선 것도 근2천년에 걸친 한국불교의 생명이 용출(湧出)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7) 현대 현대 한국불교사에 있어 가장 큰 과제는 비구, 대처간의 갈등의 정화에 있으며, 또 하나는 구미각국으로부터의 문화 침략에 대한 구조적 대처이다. 전자는 일본식민의 잔재이고 후자는 21세기 국가가 정신적 문화적 살아남기 위한 민족정기의 승화와 최소한도의 기본적 자세이다.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에 빠진 세계에 그 민족문화의 구심적인 문화정신이 빠져버린다면 소화불능에 빠진 인간과 다름이 없다. 1954년 6월 24일 서울 선학원에서 교단정화위 결성, 1 • 2차 전국 비구승대회 개최(1954. 9. 28), 1993년 10월 성철종정 반열반(般涅槃, 入寂) 1994년 현재 한국불교종단(曹溪宗)은 개혁불교표방, 새로운 종풍진작과 세계 속의 불교를 목표로 하고 있다. 불교재산관리법에 등록된 18개 종단에서 이제는 이 관리법을 악법으로 규정, 많은 군소종단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약 30개의 종단이 있으나, 그 규모나 사찰수나 신도수나 문화재 보호로 보더라도 대한불교 조계종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한국문화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정신적 어머니이다.

본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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