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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강렬(片康烈)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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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2 17:18 조회27,7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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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강렬(片康烈)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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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2. 28~1929. 1. 16.


<주요공적>



·1907년 이강년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


·1919년 황해도에서 군사주비단을 조직


·1923년 의성단 단장으로 의열투쟁 전개


·1924년 체포되어 징역7년을 받고 고문 여독으로 1929년 순국




양양한 압록강수는 밤낮으로 흘러가는 곳 어데이뇨

유유한 나의 심사(心思) 너를 따라 거지없다.

흘립천장(屹立千丈) 놉히서기 깁흔 담장안 너 그리워

탄식하는 너의 넷 주인(主人) 나를 네 보느냐

창공에 밝아있는 저 명월(明月) 아- 누구를 위하야서

교교히 빗치였는 철창(鐵窓)에 깁흔 한(恨)은 망국혼(亡國魂)이 늑기워라

언제나 언제나 붉은 담 붉은 옷 버서나 사랑하는 너를 질길소냐?





애사(愛史) 편강렬(片康烈) 의사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그리워하며 신의주 옥중에서 지은 시이다. 약관 16세에 이강년(李康秊) 의병진의 선봉장으로 구국의 대열에 몸을 바친 이래 1929년 1월 16일 불과 37세의 나이에 옥고의 여독으로 타계하기까지 20여년간을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한 일념으로 몸과 마음을 불살랐던 의사의 일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한한 감동을 안겨준다.



약관의 나이에 의병활동, 서울 진공작전 참가



의사의 선대는 경북 김천이 본거지로 할아버지대에 황해도 연백으로 이주했다. 의사는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片相薰)의 4남매중 셋째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전국 각지에서는 토왜복수(討倭復?)를 외치며 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 의사는 연고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경상·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1908년에 전국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 창의대진소(13道 倡義大陣所)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작전을 결행하게 되자 의사는 중군장 허위(許蔿)의 휘하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싸웠으나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평양의 숭실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10년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되자 비분강개하여 다시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국권회복을 휘하여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한 의사는 황해도 지회에서 은밀한 활동을 벌이던 중 일제가 날조한 소위「사내(寺內)총독암살모의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1년 제1심에서 징역 6년을 받고 1913년 3월 20일 복심법원에서 무죄 석방되었으나 2년 여간을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사의 높은 뜻은 조금도 변함이 없어, 영남일대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결사대와 선전반을 조직하여 맹렬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의사의 이러한 굳은 뜻은 의병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의병을 높이 평가한 박은식(朴殷植) 선생은 「수십년 이래로 적에게 죽어간 우리 의병은 15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그리고 「의병이란 바로 우리 민족국가의 정수(精粹)」라고 추앙하면서 「나라는 멸망시킬 수 있어도 의병과 의병정신은 멸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으니 의사의 생애는 바로 이러한 의병정신을 몸소 실천한 산 기록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무렵 의사는 한동안의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동지들의 권고와 후원으로 연안읍에서 사기점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상점을 드나들었다. 따라서 같은 뜻을 품은 동지들도 물건을 사러 가는 것처럼 무난하게 그곳을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을 거사계획의 본부로 삼는 것은 불안하였기 때문에 해성면 초장리의 유지 정종호의 집 뒷산에 모여서 이 지방의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일경으 심한 감시 때문에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못하였고 3월 15일 이후에야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가질 수 있었다.

3·1독립운동 이후 의사는 동생인 덕렬(德烈)을 상해의 임시정부에 파견하였고, 이 해 가을에는 안악에서 최명식(崔明植)·간병제(簡秉濟) 등과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을 조직하여 안악군 대표를 맡았다. 군사주비단 “군립군의 국내 진입시 원조를 목표”로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어느 매국노의 밀고로 이 사실이 일경에게 알려지게 되어 황해도 경찰부에서는 각군에 비상경계망을 펴고 검거에 착수했으며, 마침내 의사도 체포되어 1919년 9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월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의성단(義成團) 조직, 만주벌 항일무장투쟁



1921년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 출옥한 의사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부인과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점포는 모두 채권자에게 탈취당한 뒤인지라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의사는 북경과 상해 등지를 전전하며, 동지들과 조국광복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나 무장항쟁이 최선의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만주에 정착했다.

그후 1923년 10월경 산해관(山海關)에서 강진지(姜震之)·양기탁(梁起鐸)·남정(南正)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한 의사는 단장에 추대됐다. 의성단은 광활한 만주를 무대로 열과 성과 담력으로 시종일관 하면서 민족운동사상 커다란 공적을 남김으로써 중국인들의 우리 민족에 대한 존경심을 조장하고, 자칫 자포자기하기 쉬웠던 교민들에게 무한한 희망과 삶의 의욕을 심어주었다.

의성단은 주로 장춘선(長春線) 공주령(公主嶺)으로부터 장춘에 이르는 철도 연선의 양측 2백여리 지역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250여명의 단원을 무장시켜 장차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거점 마련에 주력했다.

1924년 의사는 단원들과 함께 창춘성내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 7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적 60여명을 살상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대낮에 봉천(현 瀋陽) 시내 만철병원(滿을鐵病院) 습격하여 다수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본부로 돌아오기도 했다.

당시 일제 총독부에서는 이 사건에 크게 당황하여 만주에 있던 경찰력과 밀정들을 총동원하고 총독부 사무관이던 홍모(洪某)를 특파하여 의사를 체포코자 했으나 의사는 장춘시내에「아사홍생 아생홍사(我死洪生 我生洪死 : 홍가와 나와 죽기 아니면 살기 내기다)」라는 야유섞인 벽보를 붙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적의 기습을 받고도 그때마다 과감한 지략(智略)을 구사하여 적을 농락하기를 10여차례였으니 늘 위험속에서의 생활이었다.

1924년 의사는 만주지역에 독립운동 단체들이 수없이 난립하여 그 실행방법과 활동방법이 다르고, 그로 인하여 일반 동포들이 오히려 많은 곤란을 겪게 될 뿐 아니라 독립운동 전선에 약화를 가져오게 됨을 간파하고 이의 통합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4년 7월 길림(吉林)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의 개최를 주도하여 서로군정서·길림주민회·광정단·대한독립단·통의부·노동친목회 등의 대표들과 함께 독립군 조직의 통합을 논의하였다.

8월에는 부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전가전(傳家甸)으로 가서 군자금 4,5백원을 모집하고 하얼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들과 만나 통일회(統一會)를 조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미리 탐지한 일경이 비상소집되어 불행하게도 포위를 당했으며 장시간의 총격전 끝에 마침내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고문과 옥고로 큰 별이 지다.



1924년 8월 22일 신이주로 압송된 이사는 1925년 3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7년형이 확정되었는데 판결언도가 있었던 재판정에서도 의사는 앙천대소하며 의연하게 돌아서 재판관과 방청객을 놀라게 했다.

2년 이상을 신주의감옥에서 고문과 옥고로 시달릴대로 시달린 의사가 피골이 상접하여 죽음에 직면하게 되자 악랄한 일인들도 1926년 9월 28일 병보석으로 선천 미동병원에 입원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입원에도 불구하고 골수에 맺힌 병마가 물러가지 않자 가족과 친지들이 의료시설이 구비된 일본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고했으나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1928년 9월 6일 동생이 있는 만주의 안동(현 丹東으로 옮기게 됐다. 이곳에서 4개월여간 극진한 간호를 받았으나 의사의 병세는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으며, 1929년 1월 16일 마침내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땅에 묻어줄 것이요, 나라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한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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