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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가 백제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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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2 17:02 조회27,4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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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건국신화(百濟建國神話)

부여에서 나타난 유리 백제를 세운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었다. 주몽은 졸본에 와서 결혼을 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 데, 큰아들은 비류였고 작은아들은 온조였다.
그런데 주몽에게는 부여에 두고 온 부인과 아들 유리가 있었다.
유리도 아버지를 닮아 어 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 하루는 유리가 물동이를 이고 가는 어떤 아주머니를 보고 활로 물동이를 쏘아서 구멍을 뚫 었다.
그 여자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애비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버릇없이 남의 물동이를 깨다니.
\" 유리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면서 화살에 진흙덩이를 꽂아 다시 물동이를 쏘아 구멍을 메웠다. 그러자 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유리는 조용히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네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이 되는 분으로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셨 단다. 네 아버지가 떠날 때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네가 자라서 아버지를 찾아오려거든 일 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의 소나무에 감추어 둔 물건이 있으니 그것을 찾아 가지고 오 라고. 그러면 내 자식인 줄 알겠노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일러준 말을 듣고 유리는 그 날부터 산골짜기마다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며칠이 가도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의 소나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만 지쳐버린 유리가 집 에서 쉬고 있는데 기둥에서 이상한 슬픈 소리가 났다. 그래서 그 기둥을 가만히 보니 소나 무였고 일곱 모서리로 되어 있었다. 또 일곱 모가 난 주춧돌이 기둥을 받치고 있었다.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란 일곱 모가 난 기둥과 주춧돌이고 돌 위 소나무란 기둥이 아닐 까?' 정신이 번쩍 든 유리가 기둥을 살펴보니 과연 기둥에 구멍이 있었다. 조심조심 손을 넣어 보니 무언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부러진 칼 한 조각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유리는 크게 기뻐하며 곧 행장을 차려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드디어 고구려에 도착한 유리는 왕에게 나아가 가지고 온 것을 공손히 받들어 올렸다. 주 몽왕이 가지고 있던 칼 한 조각을 꺼내 유리가 바친 것과 맞추어 보니, 칼에서 피가 나면서 하나로 이어져 온전한 칼이 되었다. 주몽은 유리가 자신의 자식임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태자로 삼았다.

남으로 내려간 비류와 온조 비류와 온조 형제는 부여에서 나타난 유리가 태자가 되자 자신들이 유리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고구려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자 신하들 가운데서도 오간, 마려 등 열 명이 이들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이들이 함 께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나자 많은 백성들도 뒤를 따랐다. 마침내 한산 땅에 이른 이들 일행은 부아악(지금 서울의 북한산)에 올라가 자리잡고 살 만 한 곳을 두루 살펴보았다. 비류는 서쪽으로 보이는 바닷가에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그를 말리 며 간하였다.
\"여기서 살펴보니 이 한수(한강) 남쪽 땅은 북쪽에 강이 있고 동쪽에는 높은 산이 감싸고 있습니다. 또 남으로 기름진 들이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처럼 살기 좋은 곳은 얻기 어려울 것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만류를 듣지 않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서쪽 미추홀(인 천)로 갔다. 온조는 그 땅에 도읍을 정하여 하남 위례성이라 하고 열 명의 신하들의 도움으 로 나라를 세워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그런데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사람이 살기에 그리 좋지 못한 곳이었다. 결국 다 시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벌써 도읍이 자리가 잡혔고 백성들도 별 어려움 없이 농사를 지으 며 살고 있었다.
비류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다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비류를 따랐 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백성들이 많아지고 나라의 세력도 커지자 이름을 백제(百 濟)라고 고쳤다. 그리고 그 조상이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부여 (扶餘)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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