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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제 1부 포악했던 왕, 업적을 남긴 왕-폭군 광적인 폭정을 일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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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5-22 17:03 조회25,1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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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광적인 폭정을 일삼다.

조선시대 왕자 중에 융이라고 있었어. 성종과 쫒겨난 윤씨 사이에서 태어나 아들이지. 융이 네 살 때 어머니 윤씨가 쫓겨났으니까 융은 그저 새로 들어온 정현왕후가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인 줄만 알았단다. 성종이 폐비 사건은 일체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기 대문이지. 그러니까 융은 자신의 어머니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야. 그러나 천륜은 속일 수 없는 것인지 융은 정현왕후 윤씨를 별로 따르지 않았어. 정현왕후 역시 폐비의 자식인 융을 사랑으로 키우지 않았단다. 친자식이 아니라도 애정으로 감싸야 하는데 말이지. 융이 다섯 살 때 일이었어. 하루는 정현왕후 윤씨와 함께 할머니 인수대비에게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갔다. 문안이란 웃어른이 편히 주무셨는지, 건강은 괜찮으신지를 여쭤보는 것이란다. 그때는 o일 아침 문안을 드렸는데 이날 아침 융이 절을 하고 바로 앉으려는데 하품이 나와 입을 크게 벌렸지. 그러자 왕후 윤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어린 세자에게 핀잔을 주었어. 융은 잠자리에 늦게 들어서 그렇다고 이야기했지만 윤씨는 글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잠자리에 늦게 들었다고 오히려 꾸짖었지.
 
인수대비도 융을 나무랄 뿐이었어. 인수대비 역시 융을 귀여워하지 않았거든. 생김새도 그렇고 걷는 모습까지 폐비 윤씨를 닮아 눈에 거슬렸던 거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이 고울 리 없었겠지. 그래서 인수대비는 융을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하며 나무랐고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했어. 인수대비가 융을 나무라면 정현왕후 윤씨가 융을 감싸줬어야 하는데, 윤씨는 융의 잘못을 인수대비에게 고해 바치기에 신이 났으니 오죽했겠어. 그렇지만 나중에 태어난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에게는 윤씨나 인수대비 둘 다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던 거야. 이런 차별대우는 융의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었어. 이런 성장 배경 탓인지는 몰라도 융은 결코 양순한 아이로 자라지는 않았어. 자신의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었고 괴팍하고 변덕스러웠지. 게다가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향도 있었다는 구나. 융을 가르치는 선생은 조자서와 허침이었어. 조자서는 성격이 대쪽 같아 잘못한 일은 그냥 넘기지 않았어. 융이 워낙 노는 것을 좋아해 공부를 전혀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자서는 늘 화를 냈지.

 그리고 성종에게 고하겠다고까지 했어. 그래서 융은 하는 수 없이 공부를 하는 체 했지만 속으로는 조자서를 굉장히 미워했나봐. 반면에 허침은 부드러운 사람이라 늘 다정한 얼굴로 유을 대했어. 공부를 하기싫어하는 융을 타이르기도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 그래서 융은 허침을 좋아했지. 어느 날 융이 장난산아 벽에 낙서를 했어. 조자서는 큰 소인이고, 허침은 큰 성인이다. 이 낙서를 조자서가 보고 불같이 화를 냈어. 융이 장난이라고 말했지만 조자서는 화가 나서는 융을 심하게 나무랐지. 그래서 융은 훗날 왕위에 오르면 조자서를 가만히 두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게 돼.

 성종도 성격이 모난 융을 탐탁하게 여기진 않았어. 어느 날 성종과 융아 함께 뜰을 거닐다가 생긴 일이란다. 뜰에 넓은 우리가 있었는데, 거기에 토끼, 사슴 등 여러 짐승들이 평화롭게 놀고 있었어. 성종은 평소 사슴을 참 좋아했어. 그래서 그 날도 사슴 우리로 가 먹이를 줬지. 융도 옆에서 아버지를 따라했어. 그런데 사슴이 먹이를 받아먹다가 갑자기 융의 손을 핥으려고 했던 거야. 융은 깜짝 놀랐고 사습의 배를 발로 차버렸어. 이 광경을 지켜본 성종은 융을 꾸짖었어.

 “동궁, 사슴이 너를 해치지도 않는데 짐승을 그렇게 발로 차면 못 쓰느니라. 말 못하는 짐승일지언정 사랑해야 하는 것이야.”

 성종은 마음이 어두웠어. 융이 고집이 세고 변덕스러운 데다가 정소용을 죽이려고 비상을 숨겨 놓은 채 죽은 어미처럼 표독스럽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융을 왕세자로 봉하는데 많은 고민을 하게 돼. 그렇지만 당시로선 봉할 왕자가 없었거든.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 뿐이었으니 말이야.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융을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고, 1482년 그를 세자로 책봉해. 이때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지.

 그 후 성종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19세의 세자 융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바로 이 사람이 10대 연산군이야.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은 아니었어.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성종을 본받아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노력했고 그 당시 나라가 안정돼 있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나라의 질서는 잘 유지되어 갔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이 어김없이 표출되기 시작했어.

 집권기 중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지. 세상에 비밀은 없는지라 연산군이 진짜 자신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서 연산군은 점점 더 광적인 폭정을 일삼지.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3개월 후에 선릉에 장사를 지내게 됐어. 그런데 장사를 지낼 때는 상주가 지문을 읽게 되어 있었지. 지문이란 것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태어나고 죽은 날 및 살아 있을 동안의 행적 등을 적은 글이거든. 그런데 연산군이 지문을 읽어 내려가다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신하를 불러 물었어.

 “지문에 나오는 판봉상시 윤기문이 누구더냐? 그리고 윤씨는 왜 폐비가 되었느나?”

 신하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뿐이였지. 하지만 연산군이 폐비 윤씨에 대해 궁금해 하자 신하들은 자세한 이야기는 꺼내지 못하고 다만 왕의 생모가 폐비되었다는 말만 이르게 돼. 그 후 외할머니가 윤씨 폐비 사건을 연산군에게 알리고 말지. 이 일로 연산군은 재위 10년에 인수대비가 병상에 눕게 되었을 때 생모 폐비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조사, 이 일로 관계된 사람들을 모두 처단하기 시작했는데 그 피해가 막심했어.

 이것이 ‘갑자사화’야. ‘갑자사화’는 겉으로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그 내면에는 연산군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고도 할 수 있어.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관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점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시켰어.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모리로 들이 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어. 그리고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했지. 이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록을 폈지만,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오르게 돼.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씨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죄하기 시작했어. 그래서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광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당했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지.

 연산군은 이 사건으로 인해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게 됐고, 그 후부터는 뭐든지 마음으로 했어. 문신들의 충고가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했지. 그리고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기멊이 철폐해 버렸어. 연산군이 정사는 도외시 하고 방탕한 생활로 날을 보내는 것에 그의 비행을 비방한 내용을 언문으로 적어 투서한 자가 있었어.

 이에 연산군은 언문을 가르치고 배우지도 말고, 배운 자고 쓰지 못하게 했고, 조정의 관리 들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언문 구결책을 다 불사르라고 명령해.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술과 여자가 있는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홍천사를 마구간으로 바꾸었어. 그리고 매일같이 궁궐에서는 연회가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뽑아올린 수백 명의 기생들이 동원되었어. 게다가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는 등 종친간의 상간을 범하기도 했어. 그야말로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던 거야.

 이렇듯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 이어지자 민심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어.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고, 급기야 1506년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어.

연산군 폐출이 성공하자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낮추고 강화도에 유배시켰는데 두 달 뒤인 1506년 11월 연산군은 그곳에서 3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지. 사람들은 연산군을 모두 참으로 포악한 왕으로 기억하고 있지. 폐비 윤씨의 한이 서려서인지 너무도 끔찍한 세상을 만들어갔으니 말이야.

출처: 박찬희 엮음, <조선왕조 오백년야사>, 꿈과희망, 10-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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