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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문화재 보호에 앞장서는 국민

한국의 옛가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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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6-07-28 14:43 조회30,0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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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우리민족의 최초의 주거환경은 수혈형식이었는데, 고조선시기를 거쳐 한사군이 설치된뒤 점차로 초옥토실(草屋土室)로 변하여갔다. 초옥토실이란 지상으로 나타난 귀틀집 형태로, 통나무를 쌓아올리며 짓기 때문에 벌목용 도끼가 필수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도구의 발달이 저장용구인 가구에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시대

이 시대의 주거양식은 《신당서 新唐書》 동이전(東夷傳)의 고려조를 보면 귀족층은 목조가구식(木造架構式)의 고상주거양식(高床住居樣式)이고, 서민층은 장갱(長坑)을 놓고 좌식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예로 고분벽화를 살펴 보면, 각저총 후실 후벽에는 두 여인이 앉아 있는 의자와 평상이 보이고 수족형(獸足形) 다리를 가진 목제상(木製床)과 기물들이 주위에 널려 있다.

또한, 쌍영총 후실 북벽에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는 평상이 있고 그 위에는 보료를 깐 것이 모두 좌식 생활에 알맞는 높이를 하고 있다. 백제와 신라의 문화도 고구려와 흡사한 점이 많다. 특히, 신라에서는 고구려의 고상주거양식처럼 바닥이 높은 마룻방 구조를 볼 수 있어 판재(板材)를 이용한 평상, 의자, 궤안 등을 썼으리라 추측된다

고려시대《고려도경》민거조(民居條)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대의 주거양식은 온돌과 마룻방 구조가 결합된 형태인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온돌이 더 개발되고 마룻방을 겹쳐 일반화된 상태이다. 특히, “탑마다 두 손님이 앉는데 손님이 많이 모이면 탑을 늘려 각기 마주앉는다.”는 기록을 볼 때 탑은 평상과 같고 그 위에 소조(小俎)를 놓고 식사를 하는 좌식 형태의 도구임을 추측하게 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나전칠이 유명하여 여러가지 유물이 보이는데, 이러한 상자는 대체로 장방형이며 의류 내지 귀중품을 보관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려사》 열전에 주인원(朱印遠)이 세황마포(細黃麻布)를 두 농이나 바쳤다는 기록에서 당시에 농이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고려시대의 등촉구는 그 형태와 크기 등이 조선시대 유물과 많이 유사한 점이 흥미있다. 물론 이 시대의 장인들도 각종 기술을 발휘하였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전통가구의 독자적 방법을 나타낸 것은 이미 이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주자학이 내세우는 가부장적 윤리와 삼강오륜을 통한 가정도덕과 사회윤리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이 양반과 상인으로 엄격히 구분되는 신분제도를 낳았고,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대가족제도와 남존여비사상의 가족제도를 만들었으며, 주택도 이러한 신분질서에 따라 서로를 격리시키는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가구도 이러한 주택구조에 맞추어 발달되었다. 주택양식은 천연의 자재 (資材)를 이용한 단층 목조가구식 구조이다.

각 방의 바닥구조는 기름먹인 장판지를 바른 온돌과 우물마루식 판재를 깐 마루가 대표적이다. 실내의 벽, 천장, 창호 등은 호지법(湖紙法)에 의한 한지를 발랐고, 마룻방 천장은 사량가구식(四樑架構式)으로 하여 서까래를 노출시키며 그 사이에 백색 회반죽 마감을 한다. 대체로 건물 벽체는 나무기둥 사이에 흙과 회로 마감하였으며, 지붕은 서민인 경우 초가와 흙담, 중류 이상은 기와와 화강석기초를 가졌는데, 완만하게 곡선을 그린 지붕선이 매우 아름답다.

평면구성은 대가족제도로 인하여 중류 이상은 동(棟)과 칸으로 나누어 사랑채와 안채의 공간구획이 이루어졌고, 서민은 한 동에서 실(室)로 나누어 사랑방(男)과 안방(女)으로 구분된다. 중류 이상인 경우 신분에 따라 동의 외곽에 행랑채가 있고 주택의 뒤나 옆에는 사당(祠堂)과 별당(別堂)이 있다. 각 실의 기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랑채, 사랑방=>남성의 거실이자 접객공간이며 서재를 겸하고 있다.
누마루           =>흔히 대청마루와 연결되어 있어 유학자들의 예(禮)를 논하는 장소
침방              =>사랑채에 배치하여 침실 기능을 하는 장소이다.
서고              =>서책의 보관 또는 독서를 위한 방이다.
안채, 안방      =>가장 폐쇄된 공간. 안주인이 거처. 남편과 직계비속 외는 출입이 금지.
건넌방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안방 건너편에 위치하여 자녀나 노부모가 거처.
웃방              => 안방 윗목에 위치한 공간으로 귀중품을 수장하는 장을 둔다.
마룻방           =>안방과 건넌방 중앙에 있으며, 관혼상제의 대사를 치르는 곳.
부엌              =>취사행동이 행해지는 곳이며 찬방/찬마루가 연이어 있다.
별채, 별당      =>본채와 분리되어 서예, 가무 기타 용도로 쓰이는 곳이다.
사당              =>선조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행랑채 행랑방 =>대문채에 연결되어 노비를 비롯한 사역인이 거처하는 곳.
청지기방        =>청지기(비서)가 거처하는 방이고 사랑방과 인접하여 있다.
광, 측            =>광은 살림도구와 음식물을 저장하는 곳이며, 측은 화장실이다.

조선시대에는 목재를 주요재료로 하는 주택양식과 더불어 가구 역시 목재의 무늬를 잘 살린 형태로 발전되어 오늘날에도 널리 극찬되고 있지만, 형태뿐만 아니라 목공결구법 (木工結構法)에 의한 독특한 기술로써 독자적 방법을 나타낸 것은 우리나라 전통가구양식의 특색을 형성하였다.

한말 일강점기고종의 집정기는 조선시대 말기로서 새로운 개혁의 막을 올린 시기였다. 오랜 세월 유학의 영향으로 인한 지배층의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민중중심의 동학사상이 전개되었고, 밖으로는 서구제국주의 열강과 일본에 의한 문호개방이 물밀듯 들어왔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1910년에 경술국치가 되면서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휩쓸려 가구양식도 점차로 서구화되어갔다. 이때에 처음으로 서구문물의 혜택을 입은 곳은 바로 왕실이었다.

궁궐건축으로부터 실내장식, 가구, 공예품까지 서구화한 입식 형태로 변하였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입식 가구가 제작되었고 서구식 가구와 전통가구가 공용되었다. 그뒤 광복과 함께 가구양식은 전통양식에서 절충식 양식으로 변하여갔다. 현재 궁중에 수장된 것 중 당시 유입된 17, 18세기 서양의 르네상스, 로코코양식의 가구와 중국의 화류가구 등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유입된 가구로는 서랍이 많이 달린 장과 차단자라 하여 중국의 차탁자와 같이 개구부(開口部)가 많은 형태가 있다. 그리고 전래의 의걸이장이 이불장으로 쓰이다가 현대의 양복장으로 변한 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그뒤 마룻가 입식 생활의 접객공간으로 되면서, 소파가 등장하고 차탁자, 협탁(脇卓), 장식장 등의 서양가구가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 자료 정보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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